땅과 공통하기

권범철(집 안의 연구자)

땅은 모든 것이다. 땅은 날지 못하고 물속에서 숨 쉬지 못하는 인간을 문자 그대로 떠받치고 있다. 우리가 다른 종으로 진화하지 않는 이상 땅 없는 세계에서는 살 수 없다. 또한 우리가 먹거리를 얻을 수 있는 건, 우리가 심은 씨앗을 땅이 키우기 때문이다. 땅속 씨앗에서 싹이 나고 자라서 나무가 되고 열매를 맺는다.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과정이지만 생각할수록 놀랍고 신기한 일이다. 땅과 멀리 있다고 느끼는 도시인도 텃밭에서 채소를 기르거나 집에서 화초를 키우기만 해도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땅은 생명을 창조하고 기른다. 땅은 신이다.

이렇게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땅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그러나 인간이 땅과 맺는 관계는 시공간적으로 상이하다. 가령 오늘날 우리는 땅을 소유한다는 생각 — 이것 역시 생각할수록 놀랍고 이상한 일이다 — 에 익숙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아주 낯선 것이었다. “땅을 소유하고 땅을 판다는 것은 구름이나 바람을 소유하고 파는 것만큼이나 생소한 관념 같았다.”1) 하지만 우리에게는 땅의 소유를 생소하게 여기는 관념이 생소하다.

자유주의 정치철학에서 소유는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다. 로크는 이렇게 쓴다.

신이 그것[땅]을 인류에게 공유물(common)로 주신 것은 명백하다. (…) 대지와 그것에 속하는 모든 것은 인간의 부양과 안락을 위해서 모든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대지에서 자연적으로 산출되는 모든 과실과 거기서 자라는 짐승들은 자연발생적인 작용에 의해서 생산되기 때문에 인류에게 공동으로 속한다. 따라서 그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자연적인 상태에 남아 있는 한,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사적인 지배권을 가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이용하도록 주어진 이상, 그것들을 특정한 사람이 일정한 용도에 맞게 사용하거나 그것으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해서는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수취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마땅하다. 인클로저에 대해서 전혀 모르며, 여전히 공유지를 빌려 쓰는 데에 불과한 야생의 인디언을 먹여 살리는 과일이나 사슴고기가 그의 삶을 지탱하는 데 유용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것이 되어야 한다.2)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적 사고는 차치하고) 로크가 보기에 인간이 생존을 위해서는 공유물을 사유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즉 인간의 생존, 아니 삶 자체는 소유에 토대를 둔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은 상품의 구매와 그에 따른 소유로 확보된다. 우리는 구매-소유가 원활할 때 ‘자유’롭다고 느낀다. 이렇게 “사유 재산이 부르주아 정치철학에서 자유의 조건이며 문명과 야만을 구별하는 표식인데 반해, 원주민 부족에게 자유는 사유 재산의 부재에 달려 있었다.”3) 이렇게 상이한 연결 — 사유 재산과 자유 / 사유 재산의 부재와 자유 — 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사유 재산과 자유

우선 사유 재산의 성립에 대해 생각해보자. 이 소유의 문제를 살피지 않으면 땅을 이해할 수 없다. 로크는 공유물을 사유물로 바꾸는 건 노동의 투여에 의해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유 재산의 확립, 특히 커먼즈(commons)의 사유지로의 전환에는 폭력이 큰 역할을 했다. 인클로저(enclosure)는 대표적인 사례다.

무자비한 폭력 아래에서 수행된 교회재산의 약탈, 국유지의 사기적 양도, 공유지의 횡령, 봉건적 및 씨족적 소유의 약탈과 그것의 근대적 사적 소유로의 전환 — 이것들은 모두 시초축적의 목가적 방법이었다. 이것들은 자본주의적 농업을 위한 무대를 마련했으며, 토지를 자본에 결합시켰고, 도시의 산업을 위해 필요한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를 공급하게 되었다.4)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땅은 “범죄의 현장”5)이라는 것이다. 땅에 기대어 살던, 땅을 커먼즈로 만들어 살던 사람들을 내쫓고 울타리를 치는 인클로저는 커먼즈[공유지]를 사유지로 전환했고 이로써 도시의 공장에 노동력으로 공급될 “무일푼의 자유로운 프롤레타리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엄청난 폭력이 동원되었다. 그래서 자본은 맑스의 말처럼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털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이 세상에 나온다.”6) 이처럼 자본주의 사회는 땅(과 그 안의 생명)에 대한 범죄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그 수탈 과정, 즉 인클로저는 “시초”에만 있었던 일이 아니라 현재 진행 중인 일이다. 우리가 기대고 있는 땅은 거의 예외 없이 숱한 강탈의 역사를 품고 있다. 우리의 일상은 그 위에 서 있다.

그 수탈 과정은 커먼즈로서의 땅에 기대 살던 이들에게서 삶을 재생산하는 수단을 빼앗아 그들을 임금에 의존하고 노동시장에서 각자도생하는 인간으로 만든다. 이것이 우리 되기를 가로막고, 그에 따라 현재의 지배 체제를 집합적 주체의 통제 아래로 두거나 다른 체계를 실현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약화시키며, 결국 기존의 질서를 변함없이 유지시킨다는 점에서 노동의 경제적 역할뿐 아니라 정치적 역할이 중요하다. 즉 노동은 우리를 계속해서 고독하게 경쟁시키면서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정치적인 장치다.7) 자본주의는 노동 강제라는 장치를 통해 자신을 유지한다.

하지만 시초축적 시기 토지의 강탈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강제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자본주의로 ‘이행’하던 시기에 임금노동에 대한 혐오는 엄청났기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그해 1월에서 3월 사이 베르사유에 제출된 진정서(cahiers of grievances)는 일용직 노동자(journalier)를 “소작농들이 상황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빠질 수도 있는 일종의 지옥”으로 언급했다. 크리스토퍼 힐은 이러한 태도가 산업혁명 시기 잉글랜드에서도 거의 보편적이었다고 말한다.8) 16~17세기 풀타임 임금노동자는 빈민(paupers)으로 여겨졌으며 가장 취약한 사람들만 풀타임 임금노동자의 지위를 받아들였다. 또한 열악한 노동 환경과 겨우 굶주리지 않을 정도의 임금을 받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임금노동의 구렁텅이를 피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다. 16세기와 17세기 초 콘월[잉글랜드 남서부의 주]의 주석 광산에서 “광부들은 대체로 임금 체계를 공공연하게 수용하기보다 환상에 지나지 않는 배당 체계의 독립을 더 선호했다.” 이것이 그들을 어느 때보다 더 깊이 고리대금업자의 부채의 늪에 빠뜨렸음에도 말이다. … 자유 광부의 지위를 일단 상실하면 회복할 수 있는 희망은 없었다. ‘여기에 들어오는 그대들은 모두 희망을 버려라’는 임금노동의 입구 위에 쓰인 글귀였다.9)

17세기 중반 영국 내전 시기에 공유지를 점거하여 정치적인 저항과 급진적인 실험을 했던 집단인 디거스(Diggers)를 이끌었던 제라드 윈스턴리의 글은 당시 인클로저가 “평민”(common people)들에게 끼친 영향과 임금노동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준다. 윈스턴리는 “공동의 보고”였던 땅이 인클로저되면서 불평등과 위계가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땅은 짐승과 사람 모두를 구제할 수 있는 공동의 보고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선생들과 지배자들에 의해 인클로저로 둘러싸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인과 종이 되었습니다.10)

그에 따르면 인클로저로 인해 “모든 이가 편안하게 살기 위한 공동의 보고로 만들어졌던 땅은 사람이 다른 이들을 고문하는 장소가 되었”고,11) “소유라는 저주 밑에서 창조된 세계는 신음하며 해방을 바라고 있”다.12) 윈스턴리가 주장하는 바는 명확하다. 본래 신이 공동의 보고로 준 땅을 사유재산으로 만든 과정, 즉 인클로저는 “억압이나 살인, 혹은 강도질”로 이루어졌고, 그렇게 “창조된 세계는 구속된 상태에 놓여 있”으므로13) 땅을 다시 공동의 보고로, “모든 사람이 함께 일하며 함께 먹을 수 있기 위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공동의 것”으로14)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조지힐과 그 근방에 있는 황폐지(waste ground)를 파서 낱알을 뿌리고 우리 이마의 땀으로 얻은 우리의 빵을 함께 먹는” 일을 시작했다. 이것은 인클로저로 인해 분리된 생산자와 생산수단을 다시 연결하는 일이며 재생산을 공동으로 재조직하는 일이다.

이처럼 인클로저로 인한 땅의 사유화를 비판하는 윈스턴리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임금노동에 대한 혐오도 분명히 드러낸다.

우리 혹은 다른 이들이 지주나 차지인으로 있는 동안 우리는 토지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거나 타인을 고용하는 터전으로 여기게 됩니다. 또는 고용을 하거나 고용되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면 창조된 세계가 다 욕되게 될 것입니다.15)

 … 억압에 의한 것이란 이런 것입니다. 이들[지주]은 간교하고 망상과 탐욕으로 가득한 꾀를 써서, 순박한 마음을 지닌 가난한 손아래형제로 하여금 그들 자신을 위하여 보잘것없는 임금을 받고 일하도록 만드는 한편, 손아래형제의 노동으로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노동하면서 그들 자신을 지배할 폭군을 세운 셈입니다.16)

여기서 “고용”은 세계를 “욕되게” 하는 일이며, 임금노동은 그 자체로 “억압”일 뿐 아니라 노동자를 지배할 “폭군”을 세우는 일이다. 이처럼 윈스턴리는 고용되어 노동하는 자는 타인을 위해 일하는 자이므로 자유롭지 않으며 동등하지 않은 자라는 인식을 분명히 드러낸다. 이러한 이해에서 노동자는 사실상 노예에 가깝다.

… 이들[일꾼]이 그렇게 노동하면 폭군과 폭정이 조장되는 반면, 고용되어 일하기를 거부한다면 폭군과 폭정이 다시 끌어내려지기 때문입니다. 품삯을 받으려고, 또는 세를 내려고 타인을 위해 일하는 자는 불의하게 일하는 것이며 저주를 계속 조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함께 일하겠다고 결심하여 땅을 공동의 보고로 삼은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손을 잡고 피조물을 구속으로부터 끌어올리고자 하는 것이고, 만물을 그 저주로부터 회복시킵니다.17)

윈스턴리는 우리에게 노동을 거부하고 땅을 공통할(commoning) 것을 권한다. 앞서 노동을 자본의 정치적 장치로 이해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게 그는 타인을 위한 노동을 “불의”이며, “폭군과 폭정”을 조장하는 일로 본다. 반대로 땅을 다시 커먼즈로 되찾는 것은 “저주로부터의 회복”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 불의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 누리는 ‘자유’ — 생계수단으로부터의 ‘자유’, 그에 따라 노동시장에서 경쟁할 ‘자유’ — 는 윈스턴리에게 “저주”이며 “억압”이다. 그에게 자유는 커먼즈와 연결되어 있다.

땅을 갖지 못한 가난한 자들이 공유지를 자유롭게 파고 그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락받으며, 인클로저 속에서 사는 지주들만큼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지 않는 한 잉글랜드는 자유로운 나라라 할 수 없습니다.18)

커먼즈에서 함께 일하는 것은 자유에 속했지만 타인을 위한 노동은 저주였기에 윈스턴리는 “임노동을 하는 이상 적의 지배를 받으나 동포의 지배를 받으나 다를 것이 없다고 선언했다. … 그들[디거스]은 임노동을 하느니 차라리 방랑하며 “피의” 법안이 규정한 대로 노역하거나 사형당할 위험을 감수하는 쪽을 택했다.”19)

디거스의 활동에서 알 수 있는 건, 땅은 “범죄의 현장”만이 아니라 “해방의 현장이자 원천”20)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땅에 대한 범죄 — 인클로저, 즉 사유화 — 는 우리를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로 만든다. 이렇게 생산적 노동자가 되는 것은 맑스가 말했듯 “행운이 아니라 불운이다.”21) 임금노동은 그 자체로 억압일 뿐 아니라 자본이 자신의 질서를 유지하는 장치다. 따라서 땅의 사유화는 우리에게 자유가 아니라 굴레를 씌운다. 그것은 우리가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선사한다. 그러나 커먼즈에서 쫓겨난 우리에게 직업을 선택할 자유는 있지만 선택하지 않을 자유는 없듯이 이 자유는 자기결정으로서의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네그리와 하트는 비슷한 맥락에서 탈거(emancipation)와 해방(liberation)을 구별하는데, 전자가 “정체성의 자유, 진정한 당신 자신일 수 있는 자유”라면, 후자는 “자기결정과 자기변형의 자유, 당신이 앞으로 될 수 있는 바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가리킨다.22) 땅의 사유화가 선사하는 자유는 주로 전자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노동자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한다. 그러나 우리가 노동하며 그 유지에 기여하고 있는 현재의 질서가 결국 사회적·생태적 위기의 원인임을 고려하면 그 자유는 결국 ‘다른 어딘가’의 생명을 위협하고 결국 자기 자신까지 위협하는 자유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노동의 탈거가 아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23)이 필요하며, 이는 우리가 다른 기댈 것을 만들 것을, 즉 공통할 것을 요구한다. 이는 사유 재산의 부정이기도 하다.

땅의 사유화가 억압과 위기의 원천이라면 해방은 그 울타리를 허물어뜨리고 땅을 재전유하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는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지와 관계 맺으려는 의지가 삶의 양식 전체를 바꾸려는 의지로 가는 첫걸음”24)이라고 주장한다. 실비아 페데리치 역시 “물질적인 재생산 수단의 ‘공통화’”가 “집합적 이해관계와 상호 유대가 창조되는 주요 메커니즘”이라고 보면서 이것이 “노예 상태의 삶에 대한 저항의 일선이자 자율적 공간의 구축을 위한 조건이며, 자본주의가 우리의 삶에 행사하는 영향력을 내부에서부터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25) 이러한 주장은 현재 우리 삶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서 출발한다. 달라 코스따가 주장하듯 자본주의의 발전은 재생산의 저발전에 기초를 두며,26) 자본주의적 지구화는 그 관계를 지구적 스케일로 확장한다.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의 재생산은 우리가 원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에게 잘 보이지 않고 우리 역시 잘 보려 하지 않는 ‘다른 어딘가’에서의 계획된 저발전에 의지하게 된다. 즉 우리가 현재와 같은 삶의 방식을 유지하는 한 우리는 그저 일상을 살 뿐인데도 이 위계화되고 억압적인 지구적 질서에 ‘기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지역, 다른 누군가에 대한 범죄에 연루된다. 땅과 다르게 관계 맺기는 이러한 인식에서 출발한다. 물질적 재생산 수단을 공통화하여 우리 삶의 토대를 창출함으로써 “우리의 재생산을 ― 세계 시장을 통해 전 세계 수백만의 강탈에 책임이 있는 ― 상품 흐름으로부터 끊어내는 일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삶과 재생산의 토대를 타인의 고통에 두는 일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타인과 분리된 존재로 보는 일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커먼즈는 불가능하다.”27) 땅과 다르게 관계 맺는 일, 즉 땅과 공통하기는 그 거부의 출발점이다.

도시를 시골화하기

지금까지의 논의를 간단히 정리해보자. 땅에 있어 우선 소유의 문제가 중요하다. 땅의 사유화는 우리를 임금에 기대어 사는 인간으로 만든다. 자본은 우리를 계속 노예 상태나 다름없는 임금노동자로 유지하고 또한 우리의 계급적 역량을 약화시키기 위해 재생산의 저발전을 꾀한다. 이 “사회 재생산의 저발전 전략”을 통해 “가난하고 고립되고 가진 거라곤 노동력밖에 없는 개인이 대량으로 생겨난다.”28) 요컨대 땅의 사유화는 노동 강제로 이어지고 이것은 우리를 억압하는 가장 큰 장치 중 하나다.

이 과정에서 또 하나 중요하게 지적해야 하는 것은 생태 문제다. 자본주의적 산업화는 인간을 노동하는 기계로 만들 뿐 아니라 자연을 원료의 더미로 간주하고 또 그렇게 대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땅과 맺는 관계는 생성이 아니라 추출이다. 자본주의적 산업이 자연에 끼치는 파괴적 효과는 사실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맑스도 아래와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자본주의적 농업의 모든 진보는 노동자를 약탈하는 방식상의 진보일 뿐 아니라 토양을 약탈하는 방식의 진보이며, 일정한 기간에 토양의 생식력을 높이는 모든 진보는 생식력의 항구적 원천을 파괴하는 진보다. 한 나라가 예컨대 미국처럼 대공업을 토대로 발전하면 할수록, 이 파괴 과정은 더 급속하게 이루어진다.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모든 부의 원천인 토양과 노동자를 동시에 손상시켜 사회적 생산과정의 기법과 결합 수준을 발전시킬 뿐이다.29)

자본은 지금까지 자연을 두 가지 방식으로 대해 왔다. 하나는 원료를 제공하는 창고로서의 자연, 또 하나는 쓰레기장으로서의 자연이다. 자본은 이러한 접근법을 통해 발전해 왔지만 이제 그것은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더 이상 수도꼭지를 틀어도 제공할 ‘선물’이 없는 자연(고갈의 문제)과 더 이상 쓰레기를 무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개수대(쓰레기장)를 제공하지 못하는 자연(독성화의 심화)이 등장한 것이다. 제이슨 무어에 따르면 이것은 더 이상 “기술적 재편이나 조직적 재편, 제국주의적 재편으로 ‘해결’될 수 없는 모순”이다.30) 그는 이 부정적 가치의 발생, 그로 인한 “저렴한 자연”의 회복 불가능을 자본주의 모형의 소진으로 이해한다. “다음 세기에 걸쳐 자본주의는 다른 모형, 또는 모형들로 대체될 것이다.”31) 어떤 식으로 대체될 지 아직 알 수는 없지만 우리가 자연과, 땅과 다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핵심은 땅의 사유화가 우리를 사회적으로 — 노동 강제에 의해 — 그리고 생태적으로 — 절멸의 방식으로 — 위협하는 자본주의적 질서의 토대라는 사실이다. 이제 다시 땅과 공통하기라는 주제로 돌아가 보자.

땅과 공통하기란 땅을 다시 우리의 커먼즈로 만드는 일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사회적·생태적 재생산 위기에 맞서는 방법이면서 우리의 계급적 역량을 키우는 일이다. 우리가 임금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기댈 수 있는 그만큼 우리의 계급적 힘은 커진다. 그동안 커먼즈 담론은 물질적 자원의 공통화를 지나간 일로 혹은 주변적인 일로 아니면 불가능한 일로 여겨왔다. 특히 정보통신 기술, 인터넷, 급속한 도시화의 맥락에서 커먼즈를 연구하는 이들의 글에서 물질적 자원은 거의 언급되지도 않는다. 비물질 영역의 확장이 물질 영역의 파괴와 오염에 토대를 두고 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빠르게 진행 중인 기후 위기 시대의 우리에게 물질에 대한 다른 이해는 필수적이다. 이 위기가 심화될 경우 우리가 현재 누리고 있는 생활양식과 그 토대의 유지를 장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는 정말로 땅과 공통하는 새로운 삶형태를 발명해야하지 않을까?

이러한 점에서 도시에서의 생산에 대해서도 다른 이해가 필요해 보인다. 네그리와 하트는 오늘날의 도시가 그 자체로 공장이 되었다고 이해한다. “삶정치적 생산이 헤게모니를 쥠에 따라, 경제적 생산의 공간과 도시 공간이 서로 중첩되는 경향이 생긴다. 생산 공간과 도시 공간을 나누는 공장의 담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 노동자들은 메트로폴리스 전체에서, 그 모든 구석과 틈새에서 생산한다. (..) 메트로폴리스와 다중의 관계는 공장과 산업노동계급의 관계와 같다.”32) 이들의 논의는 도시 공간을 가로지르며 일어나는 사회적 생산의 메커니즘을 포착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며 의의가 크다. 그러나 비물질적인 것이 특이성으로서의 다중을 연결하는 장(場)이 될 가능성을 지닌다 해도 우리 신체의 재생산을 담보할 수는 없다. 그에 따라 우리의 삶은 여전히 ‘다른 어딘가’에서의 착취와 억압에 연루된 채 남을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도시에서 땅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임금에 대한 우리의 절대적 의존을 떨어뜨려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계급적 역량을 키울 수 있고 위기를 예방하며 또한 그것에 적응할 수 있다.

문제는 도시에 사는 많은 이들에게 땅과 다른 관계를 맺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페데리치가 들려주는 나이지리아의 사례를 참고해 보자.

내가 포트하커트 대학에서 아직 기억하는 또 다른 이미지는 야자나무 사이에서 지는 해를 보기 위해 저녁에 덤불로 가는 것이다. 페달을 밟으면서 나는 몇몇 동료들의 자동차가 지나가는 걸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대학의 땅에 심은 식용 작물이 잘 자라는지 확인하러 가던 길이었다는 것을 이내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 땅을 소유하지 않았고 그것을 직접 재배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좋은 땅의 유용함을 이용하지 않고 완전히 임금에 의존하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

그리고 소가 있었다. 인근의 칼라바르 대학에는 매년 봄 소떼가 왔다. 그 소들은 풀을 뜯기 위해 북쪽에서 왔다. 목축업자들은 그 소들을 팔기 위해 남쪽으로 데려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소를 팔기 전에 그들은 우림 지대의 영양이 풍부한 풀로 소를 살찌우고 싶어 했다. 대학은 이러한 필요를 위해 공간을 제공했고 소를 수용했다.33)

이 재시골화된 대학의 사례는 우리가 아는 대학과는 무척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곳이 비물질 노동(강의, 공부, 세미나 등)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재생산 노동(청소, 요리 등)만이 아니라 일상을 재생산하는 노동이 진행되는 현장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페데리치가 나이지리아에서 만난 동료들은 그의 “유일한 보장 수단이 임금이고, 돌아갈 마을이 없으며, 어려울 때 그를 지원해 줄 공동체가 없다는 것”, 즉 우리 대부분의 삶형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삶형태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이처럼 IMF와 세계은행의 구조조정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에서는 자급적 삶형태가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특히 자급적 삶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여성은 세계의 자급 농부들이다. 아프리카에서 여성을 설득하여 그들의 활동을 환금 작물 생산으로 바꾸려하는 세계은행과 다른 기관들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사람들이 소비하는 식량의 80퍼센트를 생산한다. 1990년대에 많은 아프리카 도시에서 여성은 식량 가격이 인상되자 공공 토지의 일부를 전유하여 “길가에 … 공원에, 철길을 따라” 옥수수, 콩, 카사바를 심었다. 이는 아프리카 도시의 풍경을 바꿨고 그 과정에서 도시와 시골의 분리를 허물어뜨렸다.34)

이것은 중요한 사례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임금노동에서 배제된 이들 — 여기서는 여성 — 이 물질적 재화의 공통화를 모색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오늘날 도시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이는) 커먼즈를 찾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노동에서 (자의든 타의든) 배제된 이들의 삶을 살피는 것이다. 노동을 거부한 이들은, 임금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통해서 살아가야 하므로 그 무언가를 발명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우리가 커먼즈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로 이러한 과정에서 창발하는 다른 무언가다. 우리는 현대 도시에서 찾기 어려운 것으로 여겨지는 커먼즈를, 노동을 거부한 이들의 삶에서 대부분 발견할 수 있다. 요컨대 노동에서 배제된 이들은 노동을 거부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삶의 방편을 만들어가는 자이며, 그것이 이들의 삶을 살펴야 하는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도 도시에는 공통할 물질재화와 제도적인 뒷받침이 부족한 탓에 물질재화와 다르게 관계 맺는 일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이유로 비임금자들(the unwaged) 간의 관계, 즉 인간-인간의 관계는 활성화되지만 인간-땅의 관계는 여전히 부족하다. 위 아프리카 도시의 사례가 의미 있는 건 그 여성들이 두 관계 모두를 활성화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의 도시 공간 대부분이 (삶정치적 생산의 관점에서는 생산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철저히 심미적 소비 경관으로만 유지되는 것 ― 대표적으로 공원 ― 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우리는 도시를 좀 더 ‘생산적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땅과 공통하기

그러나 우리가 땅과 공통하기에는 여러 장애물이 많은 것 같다. 첫째는 지나치게 정상화된 ‘노동하는 삶’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노동이 차지하는 위상을 크게 떨어뜨려야 한다. 이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겠지만 여기서는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근면한 삶은 결국 현재의 위기에 ‘기여’하는 삶일 뿐이라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현 질서에 대한 ‘기여’가 아니라 ‘변형’이라는 것만 이야기하기로 하자.

둘째는 노동에 대한 몰입으로 인해 현대인에게 나타나는 특별한 ‘가난’이다. 이반 일리치는 경제의 성장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가난하게’ 만드는지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현대화된 가난’은 과도한 시장 의존이 어느 한계점을 지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 가난은 산업 생산성이 가져다 준 풍요에 기대어 살면서 삶의 능력이 잘려나간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풍요 속의 절망이다. 이 가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은 창조적으로 살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데 필요한 자유와 능력을 빼앗긴다. 그리고 플러그처럼 시장에 꽂혀 평생을 생존이라는 감옥에 갇혀 살게 된다. 현대의 이 새로운 무력함은 너무나도 깊이 경험되는 것이라 겉으로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35)

일리치는 이 “신종 가난”을 부자와 빈자 간의 소비 격차와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한 소비 격차는 “계급 투쟁”으로 줄일 수 있는 문제지만 이 “산업화된 무력함”은 분배를 개선하거나 생산수단을 재전유하는 방식으로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그것은 현대의 산업화로 인해 나타나는 “인간의 무력함”, “우리 시대에만 겪는 특별한 가난”으로서, 우리가 산업의 성장을 ‘좋은 것’으로 간주하는 이상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인간은 “자율은 무너지고, 기쁨은 사그라지고, 경험은 같아지고, 욕구는 좌절되는 과정”을 겪는다.36)

요컨대 노동에 매몰된 우리가 한 가지 일에 숙련된 인간이 되고 그것의 보상에 나의 모든 생계가 달린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리의 삶을 유지하고 창조하는 전반적인 역량은 크게 위축된다. 우리는 삶의 재생산을 모두 상품의 구매에, 그에 따라 임금에 의존하게 되며, 우리의 삶은 권태와 불안에 빠진다. 페데리치도 유사한 맥락에서 아래와 같이 우리의 무능력에 대해 언급한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기술 혁신의 역사와 병행하여 진행된, 우리의 전자본주의적 지식과 역량의 탈축적의 역사를 쓸 수 있다. 이 탈축적은 자본주의가 우리 노동의 착취를 만들어내기 위한 전제이다. 식물과 꽃의 성분을 읽을 수 있는 역량, 식물과 꽃의 의료적 속성을 발견할 수 있는 역량, 땅에서 자양물을 획득하는 역량, 숲에서 살 수 있는 역량, 길과 바다에서 별과 바람을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역량은 파괴되어야 했던 ‘자율’의 원천이었고 여전히 그러하다. 자본주의적 산업 기술의 발전은 그러한 상실 위에서 이루어졌고 그 상실을 증폭시켜왔다.37)

이러한 무능력은 땅과의 관계 맺기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니 우선 어떤 식으로든 땅(과 그 안의 생명)과의 관계를 시작하는 일이 필요해 보인다. 이는 오늘날의 위기 상황에서 더욱 절실한 일이 될 것이다. 달라 코스따의 말처럼 “살 수 있는 것이 독극물뿐이라면 임금이 무슨 소용인가?”38) 그나마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례, 즉 텃밭을 일구는 건 이런 맥락에서 중요한 활동이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기능적인 활동으로만 축소될 때 그 의미는 크게 반감될 것이다. 공통하기는 자원의 공유만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다른 인간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요는 다르게 생존하는 법을 발명하는 것이다. 애나 칭이 지적하듯 대중문화에서 생존은 정복과 팽창의 동의어로 여겨지지만 사실 어떤 생물종이든 생존을 위해 필요한 건 “적합한 협력”이다. 생존은 언제나 타자를 수반하며 따라서 “우리는 생물종 내에서, 그리고 생물종 간에 이뤄지는 협력을 통해 변화한다.”39) 우리는 그 마주침을 통한 “오염”이 선사하는 가능성을 찾아나서야 한다. 여전히 부족한 생물종 내의 협력뿐 아니라 잘 시도하지 않았던 생물종 간의 협력, 땅과의 협력에 나설 순간이다.

1) Kirkpatrick Sale, The Conquest of Paradise: Christopher Columbus and the Columbian Legacy (New York: Knopf, 1990), 314; Silvia Federici, “Beneath the United States, the Common,” in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Oakland, CA: PM Press, 2019), 79에서 재인용.

2) 존 로크, 『통치론: 시민정부의 참된 기원, 범위 및 그 목적에 관한 시론』, 강정인·문지영 옮김, 까치글방, 1996, 34.

3) Federici, “Beneath the United States, the Common,” 79.

4) 칼 마르크스, 『자본론  I(하)』,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2001, 1005-6.

5) Elizabeth Hennessy, What Is Land? A Conversation with Tania Murray Li, Rafael Marquese, and Monica White, 2019, https://edgeeffects.net/wp-content/uploads/2019/12/Plantationocene_LandTalk_BookletFinalDraft.pdf.

6) 마르크스, 『자본론  I(하)』, 1046.

7) 이에 대해서는 다음을 보라. Harry Cleaver, Rupturing the Dialectic: The Struggle against Work, Money, and Financialization (AK Press, 2017).

8) Christopher Hill, Change and Continuity in 17th-Century England (Yale University Press, 1991), 219.

9) Ibid., 221.

10) 제라드 윈스턴리, 「잉글랜드의 권력자들과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에게 하는 선언」, 『자유의 법 강령』, 김윤경 옮김, 한길사, 2011, 62.

11) 같은 글, 64-5.

12) 같은 글, 66.

13) 같은 글, 76.

14) 같은 글, 86.

15) 같은 글, 76.

16) 같은 글, 76-7.

17) 같은 글, 87.

18) 같은 글, 80.

19)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황성원·김민철 옮김, 갈무리, 2011, 116-7.

20) Hennessy, What Is Land? A Conversation with Tania Murray Li, Rafael Marquese, and Monica White.

21) 마르크스, 『자본론  I(하)』, 684-5.

22) 안토니오 네그리·마이클 하트, 『공통체』, 정남영·윤영광 옮김, 사월의책, 2014, 453.

23) 같은 책, 455(강조는 원저자).

24)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페미니즘의 투쟁』, 이영주·김현지 옮김, 갈무리, 2020, 336.

25) Silvia Federici,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in an Era of Primitive Accumulation,” in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Oakland, CA: PM Press, 2019), 108.

26) 달라 코스따는 신자유주의가 구조조정 정책으로 재생산의 저발전을 꾀한다는 점에서 케인스주의만큼이나 ‘기획된’ 자본주의 전략이라고 주장한다(달라 코스따, 『페미니즘의 투쟁』, 348).

27) Federici,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in an Era of Primitive Accumulation,” 109.

28) 달라 코스따, 『페미니즘의 투쟁』, 232-3.

29) 마르크스, 『자본론 I(하)』, 679-680.

30) 제이슨 무어, 『생명의 그물 속 자본주의』, 김효진 옮김, 갈무리, 2020, 433.

31) 같은 책, 462.

32) 네그리·하트, 『공통체』, 350-2.

33) Silvia Federici, “The University: A Knowledge Common?,” in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Oakland, CA: PM Press, 2019), 99-100.

34) Federici,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in an Era of Primitive Accumulation,” 107.

35) 이반 일리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허택 옮김, 느린걸음, 2014, 6.

36) 같은 책, 7-12.

37) Silvia Federici, “Re-enchanting the World: Technology, the Body, and the Construction of the Commons,” in Re-enchanting the World: Feminism and the Politics of the Commons (Oakland, CA: PM Press, 2019), 191.

38) 달라 코스따, 『페미니즘의 투쟁』, 244.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일본 정부가 핵오염수를 이틀 뒤 바다에 방류하기로 최종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린다.

39) 애나 로웬하웁트 칭, 『세계 끝의 버섯: 자본주의의 폐허에서 삶의 가능성에 대하여』, 노고운 옮김, 현실문화연구, 2023,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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