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입맞춤하다

샤머니즘의 관점에서 본 땅과 인간의 관계

임지연 ㅣ 미학자, 퍼포먼스 아티스트

땅과 입맞춤하다

저는 생태 위기, 기후 위기를 이야기하는 오늘날, 땅을 포함한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인간의 태도에 관한 문제를 샤머니즘의 관점에서 풀어보고자 합니다. 제목을 ‘땅과 입맞춤하다’라고 붙여 보았는데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주로 몸을 중심으로 해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합니다. 그동안 인간이 자부심을 가져왔던 ‘이성중심주의’라는 시각을 이제 내려놓고 몸의 관점에서 땅과 생태 문제에 접근하고자 합니다. 에로틱한 느낌이 나길 바라는 마음에서 ‘입맞춤’이란 표현을 썼는데, 사실 입맞춤 정도로는 그리 에로틱한 느낌이 나진 않지요? 모쪼록 몸에서 일어나는 ‘활력’ 내지 ‘활기’ 등을 떠올리시면 되겠습니다.

왜 샤머니즘인가? 

현대 문명은 과학기술과 자본주의를 기초로 인류 역사상 가장 편리하고 풍요로운 시대를 일구었습니다. 이것이 마냥 좋은 것이라면 이 기조로 그대로 진행되면 되겠죠. 그러나 ‘위험사회’라는 말이 보편화되었을 만큼, 이제 오늘날의 발전 논리와 방법은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는 특히 코로나 팬데믹 이후 연령, 직업, 국적 불문하고 다 같이 공감하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위험사회가 비롯된 원인을 찾자면 우주의 역사, 인류의 역사 전체를 살펴야 하겠지만, 과학기술과 자본이라는 현대의 작동 원리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낸 원인은 17세기 이래 서구의 근대적 세계관 내지 진리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서구 근대의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로, 근대인은 인간 이성을 중심 원리로 삼아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자 합니다.

문제는 이성 중심으로만 끝나는 것이 이성 우월로까지 위계화시키면서 과도한 이성 집중이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모호하고 혼란한 것, 불투명한 것을 싫어하는 이성은 ‘분리’와 ‘정화’를 자신의 활동 모토로 삼습니다. 시간(중세-근대)이든 공간(안-밖)이든, 존재(신-인간-자연)이든, 정신(이성-그 외 인간 능력)이든, 이성은 각자의 고유 영역을 분리하고 이들이 자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도록 하는 원리를 ‘이성적으로’ 부여해 줍니다. 소위 이성의 계몽 작업이 진행된 것이죠. 

‘분리’와 ‘정화’를 기초로 작동하는 이성 원리를 넘어서 보자는 것이 기후위기 시대 샤머니즘을 제안하는 취지입니다. 이성에 따라 관념 속에서 순수한 영역으로 나뉘어진 존재들을 상호 연결하고, 생명 존재의 (순수성이 아닌) 복합적이고 혼합적인 측면에 주목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미 지식은 차고 넘칩니다. 지식 생산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성을 도구로 삼아 무엇인가를 ‘안다’는 활동 만으로는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이제 ‘앎’에서 ‘함’으로의 전격적인 전환이 이루어져야만 할 때이고, 이때 어떤 몸으로 삶-행위를 이어갈 것인지, 우리는 살펴야 하겠습니다. 

‘샤머니즘’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즘’, ‘-주의’ 역시 이성을 통한 관념화 작업이기에 앎에서 함으로의 전환에 딱 들어 맞는 접근은 아닙니다. 적극적인 몸 운동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저는 ‘샤머니즘’ 대신 ‘샤먼-되기’를 제안합니다. 

새로운 몸 만들기와 ‘샤먼-되기’

이성을 통한 개념 생산이 아니라 상호 연결과 혼합적인 몸을 직접 구성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연결과 혼합 운동을 저는 온전히 샤먼의 몸에서 발견합니다. 의례 과정 중 샤먼은 ‘엑스터시’, ‘트랜스’, ‘포제션’ 등 독특한 정신적, 신체적 상태에 진입합니다. 

의례 중 샤먼은 ‘자아’ 를 의식하기 보다는 그 자리에 소위 ‘신’이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들고, 우리 식으로는 ‘조상신’도 듭니다. 동물의 소리나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고, 알아 들을 수 없는 미지의 말을 내뱉기도 합니다. 

샤먼의 몸에서는 신과 자연이 연합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명확한 구분 없이 혼융됩니다. 샤먼은 천상과 지하를 여행하며 사람들이 궁금해 하거나 상실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샤먼의 의례는 민족마다 다른 형식을 보이긴 하지만 천상과 지하, 그 사이의 인간이란 세계 구성은 대동소이합니다. 의례를 통해 샤먼은 주로 망자를 달래고 영혼의 병을 치유하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굿과 활력   

한편, 우리 의례인 ‘굿’은 다른 민족의 의례와는 다른 특성을 보입니다. 예컨대 다른 민족이나 대륙에서 샤먼은 ‘신’ 을 기리거나 ‘숭배’하고 있다면, 우리 ‘굿’은 신에 대한 숭배를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당을 포함하여 굿에 참여하는 자들, 즉 산 자든 죽은 자든 이들이 굿이 열리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여기’에서 어떤 체험을 하는가를 중시합니다. 산 자든 죽은 자든, 맺힌 데가 있으면 풀고, 슬픔을 느끼면 달래주고, 상처가 있으면 서로 치유해 준 뒤, 산 자는 산 대로, 죽은 자는 죽은 대로 각자의 길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굿의 가장 고유한 특징입니다. 

저는 우리 굿에서 기후위기 시대 땅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성찰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지혜를 얻습니다. ‘신’이라는 것 역시 어쩌면 하나의 ‘관념’이자 정신의 현상일 수 있습니다. 우리 굿에서 강조하는 ‘활력’은 관념으로서의 신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신, 몸을 가지고 있는 신, 아니 신이라는 말도 필요 없을 ‘생명’ 그 자체를 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은 관념이나 초월적 대상으로서의 신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살아있음’, ‘생명’, ‘활력’ 입니다. 

활력을 통한 공동체의 구성

근대 이래 인간의 사회, 공동체의 구성 원리는 이성이었습니다. 이성이 인간의 본능을 규제하고 조절함으로써 소위 사회가 노동력과 일정한 수준의 재화 및 문화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죠. 언제든 과도한 것이 문제입니다. 이성의 자기 조절 능력이 과도해 지면 이게 억압이되고 폭력이 됩니다. 

이성 원리로 문명을 유지하는 것이 한계에 이르른 오늘날, 저는 사회 구성의 원리로 활력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혼자 있을 때나 같이 있을 때나, 정확하게 계산하거나 명확하게 논증할 수 있는 형식의 진리는 아니지만, 활력을 증가시키는가 감소시키는가를 기준으로 우리 삶과 진리관을 다시 수립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실상 위에서 말한 샤먼-되기, 샤먼의 몸에서 일어나는 ‘엑스터시’ 등의 체험 역시 우리 일상에서 대단히 간명하게 구현될 수 있습니다. 엑스터시라는 체험이 과연 우리 삶에 어떻게 작용하는가? 이는 쉽게 말해 에로스, 생명의 힘으로 충만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어떤 초월적인 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이 드러나는 것은 대단히 평범한 것, 예컨대 다정함이나 친절 등입니다. 이는 전혀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삶의 순간 순간이 과연 에로스로 충만해 있는가, 나는 상대를, 세상을 다정하게 대하고 있는가, 친절을 실천하고 있는가? 에로스로 충만한 자는 분노할 때 조차도 그 은은한 마음을 잃지 않습니다.

나의 ‘샤먼-되기’ 

‘샤먼-되기’를 개념적으로 정의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겠지만, 애초 지니고 있는 취지가 관념화의 경향을 벗어나는 것이기에, 제가 경험한 사례를 소개하는 것도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빗소리를 듣고 각성하여 춤을 추기 시작한 뒤로, 저는 많은 꿈을 꾸었고 이성적으로는 미처 다 설명할 수 없는 체험들을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아름답고 슬픈 경험이지만, 이 특수한 체험을 사회의 보편적 원리로 삼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삶을 살면서 꼭 이성만을 원리로 삼을 필요는 없다는 사실만큼은 함께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생태조례준비팀은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를 같이 읽었고, 여기서 보았던 ‘혼맹(soul blindness)’라는 표현은 저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 책에서 콘은 인간만이 아니라 동물과 식물 역시 나름의 기호작용을 통해 생태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들의 ‘살아있는 사고(the living thinking)’ 에 주목하여 인간의 세계 역시 인간만의 특성(즉 이성으로 세워진 세계)을 벗어나 확장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  인간은 혼을 지니고 있고, 혼을 통한 기호 작용은 인간이 과거-현재-미래, 신-인간-자연 등의 명확한 경계를 허물고 전체가 통합된 세계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합니다. 

샤먼-되기를 통해 살펴 본 땅과 인간의 관계 

혼이나 초월성에 대해 현대인은 편견을 가지고 있기 쉽습니다. 현대 사회의 구성 원리는 이성이고, 그나마 많이 확대되어 감성 정도를 이야기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혼이나 초월성 등을 말하며 기도와 수행을 하는 장소는 교회나 사찰 등 특정 공간으로 한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초월성은 단지 특정 종교적 행위나 의례를 하는 동안만 발휘되는 능력이 아닙니다. 초월성은 인간에게 이성과 감성 원리가 형성되기 전 근원적 생명력의 차원에서 발휘되는 능력으로, 비단 종교 행위만이 아니라 일상의 ‘활력’이란 형태로 존재하는 한 언제고 상존해 있습니다. 

본 발표인 샤먼-되기의 관점에서 본 땅과 인간의 관계에서 결론적으로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초월성을 회복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는 곧 한 존재의 경계를 개방시켜 가는 과정이기에, 오늘날 인간 중심, 이성 중심의 사고 방식, 나아가 소유와 지배의 욕망을 성찰하고 보다 생태적으로 올바른 태도를 지닐 수 있도록 하는 적절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초월적 능력, 영혼의 힘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살아 움직이고 있는 원시적 생명력을 일깨우는 능력입니다. 또한 자신 안에서 꿈틀대는 이 원시적 생명력은 인간과 자연이 공히 취하고 있는 ‘공통적인 것’, 소위 ‘커먼즈’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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